남부군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 최후 격전지를 찾아 화개면 의신부락을 거처 삼정에서 차를 두고 걸어서 빗점이란곳을 찾았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큰 바이가 많았다. 너덜바위 지대가 펼처진다. 그곳에 하동군에서 입간판을 세워 현장 위치를 알게 했다.
이현상 유적지를 찾으려면 화개장터에서 신흥다리를건너-의신-삼정-빗점골 너덜바위로 찾아가면됩니다.
누군가 어떤생각으로 이름 부분을 훼손시켯다.
너덜바위
삼정마을
이현상 격전지 가는 길이 보인다.
아래 보이는 넓은 바위가 사살현장
빗점계곡에 물이 흐른다.
삼정마을
빗점골 들어가는 입구
여순 10.19 반란사건 빨치산 유입경로
너덜바위
이현상 생의마지막장소
김일성과 이현상 북한로동당 가관지/서호련
글쓴이:이태술 지리산고향뉴스에서 가져왔습니다.
92년 10월 7일 북한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평양에 있는 이현상 가족에 대한 기사를 한 면에 걸쳐 실었다. 이 현상이 김일성을 만나면서 자신의 자녀를 부탁하는 대목과 김일성이 이현상의 아들 이극을 만나는 기사가 실려 있다. 또 북한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금수강산>10월호는 이현상의 가족이 모두 북한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들의 사진과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1948년 이현상은 남한에서 공산당의 불법화로 박헌영과 함께 평양에 있었고, 가족은 모두 남한에 있었다.
이현상이 빨치산 투쟁을 위해 다시 남으로 내려오는 직전에 <로동신문>이 실은 기사의 요지는 이러했다. ‘이현상이 남쪽으로 내려가기 직전, 김일성은 이현상을 만났다. 김일성은 이현상에게 “하고 싶은 말과 부탁이 있으면 서슴치 말고 하라.”고 했다. 이에 이현상은 흘러내리는 안경을 바로 잡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띄엄띄엄 “저의 아들 딸 4남매의 앞날을 김일성에게 부탁합니다.”고 했다. 이에 김일성은 이현상의 손을 잡으며 “어서 아들을 보내라. 아들도 보내고 유망한 청년들도 보내라.”고 말했다. 이현상이 북한을 떠난 지 두 달 후인 48년 8월, 이현상의 아들 이극과 몇몇 청년들이 평양으로 왔다. 이현상이 먼저 아들만 북한에 보낸 것이다. 그때 이극은 21살의 청년이었다. 김일성은 이현상의 아들을 만났다. 김일성은 같이 온 청년들과 나이가 엇비슷해 누가 이현상의 아들인지 몰랐다.
김일성이 “누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인가.”고 물었다. 이극이 정중히 인사하자 김일성은 “동무가 이현상 동지의 아들이라, 그래 이름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이현상 아들이 “이극.”이라고 대답하자 김일성은 “항상 이긴다는 뜻이구먼, 이름이 좋다.”고 말했다. 이현상의 아들이 먼저 북한을 가고 부인을 비롯한 세 딸은 이현상이 죽은 후에 북한으로 넘어갔다.
금수강산 10월 호는 이현상 가족이 북한에 오게 된 사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현상 최후 이후에 남한은 일가족까지 학살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빨갱이 씨를 낳았다고 어머니를 고향 밖으로 내 쫒았다. 우리 일가에 현상금이 붙어있어 한 달에 일곱 번 이상 집이 아닌 허청간, 창고에 몸을 피해 굶주렸다. 우여곡절 끝에 열사의 아내 최문기와 세 딸, 그리고 셋째 형(이현식)의 아내와 자녀 중 두 아들과 딸이 북한에 들어왔다.
이현상의 부인과 자녀들이 어떻게 북한으로 갔는지는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지만 53년 말에서 54년 이후에 북한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61년 김정일이 이현상의 부인과 자녀가 사는 집을 처음 방문했다는 <로동신문>보도로 볼 때, 61년 직전 북한으로 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현상의 부인 최문기와 세 딸은 남한에서 오랫동안 숨어 살았을 것이다. 이현상은 살아 있을 때인 51년, 이미 북한에서 국기훈장 제 1급을 받았고,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김일성은 지리산에 있는 이현상에게 영웅훈장 약장을 보낼 정도 였다. 그 후 이현상이 사살된 후인 68년, 북한은 정식으로 혁명, 애국열사로 선정했다. 이때 이현상은 열사증 000001번으로 첫 열사증을 추서 받았다. 그리고 혁명열사릉에 가묘가 만들어져 있다. 또 이현상은 90년 8월 조국통일상을 추서 받았다. 물론 그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각별한 지시에 의해서였다. 로동신문은 김정일이 이현상의 가족의 집을 방문하고 자녀들을 자주 불렀다고 보도하고 있다.
로동신문의 한 기자는 이현상이 남조선에서 받는 처우와 북한에서의 처우는 하늘과 땅 사이라고 하면서 ‘남쪽에서는 한 작가가(이태) 인민유격대 수기에서 리현상을 썼던 정도였지만 그리고 이현상이 죽은 빗점골에 ‘공산비적 리현상이 죽은곳’이란 말뚝을 세우는 정도였졌지만 북에서의 리현상은 애국열사릉 높은 언덕위에 세워져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영생하고 있는 영웅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고향인 충남금산군 외부리(가마실)는 빨갱이 동네, 모스크바로 불리며 6.25가 끝나고 숨도 못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큰 사람이 나다 보니 아랫사람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지’ 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에 원망은 없다‘는게 외부리의 정서이다. 전쟁 후 한 동안 이현상의 어머니와 형수가 살고 있을 땐 군수가 바뀔 때 마다 인사를 다녀갔다는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금산일원에서 이현상은 이단아이기 앞서 큰 사람이요 지역의 영웅이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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