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현 유래
본래 신라의 땅으로 경덕왕 때 합포현(陜浦縣)이었는데 고려 현종 때 진주에 예속시키면서 화개부곡으로 낮추었다. 조선시대에는 숙종 때 진주의 면으로 만들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하동군에 편입되어 화개면이 되었다.
(화개 라는 행정지명 이 신라 경덕왕때 (서기 757년) 부터 사용되면서 화개부곡이 신증 도욱여지람 이 편찬되는 1530년 여년이된다. 화개에는 茶所가 있어 조정에 차를 진상하였다. 화개면지 상권 67페이지 )
이 지역은 지리산 남쪽 섬진강 동쪽에 있는 지역으로( 고려) 때 쌍계사(雙磎寺)로 가는 길목의 벚꽃이 만발하는 곳에 있다 하여 화개(花開)라는 명칭이 붙었다.
조선시대에는 하동에서 이곳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구례의 화엄사(華嚴寺)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쌍계사를 거쳐 지리산의 천왕봉(天王峯)에 이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악양(岳陽)과 함께 백제와 국경을 이루는 요새지였다.
고려: 918년부터 1392까지 474년
하동군지에서
화개장터의유래 비문
섬진강 수운이 문을 열렸던 그 때부터 영남과 호남을 잇던 이곳에 사람이 모였고
요새로 단장되어 화개관 이라는 불러진 삼한시대에 장터 구실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저 온다
수많은 세월 속에 삶의 터전이 되어온 화개장은 1726년에 번성기를 맞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시장이 되었고 객주의 오고감이 끊이지 않았으나 교통과 유통 구조의 발달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옛 향수와 추억속의
땅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수해 상습지로 그 구실(장터) 상실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냈지만 어쩔수 없는 시대상황으로 역사의 이끼만
남았구나, "역마"의 공간적 배경이 였던곳, 지나는 길손에게 화개장터 임을 알리는 돌을 세워 옛일을 되세겨 본다.
건립일 서기 1991년 8월 15일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에 화개곡(花開谷)이 탑 중앙에 있다. 그리고 옥천사(쌍계사)를 창건한 삼법화상 글도 보입니다.
쌍계사 국보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에 화개골
통일신라 후기의 유명한 승려인 진감선사의 탑비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 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
이중한 택리지 화개이야기
구례군과 하동군의 경계에 있는 화개장터는 섬진강을 이용하는 수운(水運) 때문에 발달된 장터였다. 택리지(조선 영조 때 李重煥 著)에 보면 求禮 남쪽의 九灣村은 거룻배를 이용하여 생선과 소금 등을 얻을 수 있어 가장 살만 한 곳이라고 수록되었다. 구만촌(九灣村)은 지금의 구례구이다. 거룻배가 이곳까지 왔다고 추측된다.
뱃길이 화개장터까지 닿아 남해 여수 거제 삼천포등 남해안의 해산물이 이곳까지 실려와 하동구례. 남원. 함양 등지의 내륙지방의 농산물, 지리산에서 나오는 임산물들과 교역되었다.
세월이 지나 륙로 교통이 발달되고 섬진강 하상(河床)이 점점 높아져 수운(水運)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금은 하동포구 80리를 오르내리는 범선의 자치는 찾을 수 없다.
우마차 등의 수레가 다닐 수 없는 육로에서의 운송수단은 등짐 밖에 없었다. 화개에서 내륙으로의 이동통로는 영남내륙은 장터목으로 전라도 내륙과 충청도 등지는 벽소령과 화개재를 통하여 지리산 종주능선을 넘었다.
전라도는 섬진강 강변을 따라 이동하였다. 화개에는 등짐장수 즉 새우젓이나 소금 등짐장수 등의 음담패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김동리 단편소설이 화개장터를 주 무대가 되었다.
이러다보니 화개에는 큰 장이 형성 될 수 가있었다.
화개장터의 특징은 여러 지방의 생산물이 모였다가 다시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집하(集荷)시장내지는 중개시장 이었을 것이다. 배에서 하역된 수산물은 보부상에 의하여 내륙으로 다시 보부상들에 의해 모아진 내륙의 임산물. 짐승가죽. 약재 등은 배로 실려 가는 형태였을 것이다.
화개장도 처음에는 상설시장도 아니었고 정기적으로 정해진 날에 서는 정기적인 시장도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바닷물이 만조일 때 소금배가 들어오면 인근의 보부상들이 내륙의 특산물을 지고 와서 소금과 물물교환 등의 거래를 하면 자연히 이틀이고 사흘이고 장이 서는 것이다. 따로 정해진 장날이 없었다. 그러다 전국의 곳곳에 시장이 생기니 정해진 날에 장이 서게 되고 인근지방과는 같은 날을 피하여 10일마다 혹은 5일마다 장날이 생기게 되었다.
전라도에 기근이 심하게 들자 신숙주(申叔舟 1417 ~ 1475년) 의 주장으로 5일장이 최초로 서게 되었다하나 확실하지 않다.
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시적고(市糴考)’ 의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향시(鄕市)에 보면 하동에는 화개장(1,6일), 두치장(豆置場) (2,7일), 횡포장(橫捕場)(3,8일), 주교장(舟橋場)(5,10일)
이러한 시장권이 형성된 河東 지역의 특성은 수로(水路)교통의 요지인 섬진강을 따라 일렬로 배치된 형국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주로 어염(漁鹽)업을 중심으로 행상선(行商船)의 왕래가 활발하였다.
1924년 현재 河東군내 거래액으로 본 시장규모는 읍내(河東) 1,352,270圓 화개시장 28,430圓 (7개의 시장중 2번째로 )횡천장 1,960圓 주교시장 11,655圓
노량시장 6,150圓 진교시장 26,576圓 문암시장 6,098圓 총 7개소 매매고 1,433,139圓 (하동군지 상 하동권 상업 1.시장 1052페이지)
특히 광복 후의 사회혼란에 이어 발발한 6.25사변으로 말미암은 지리산(智異山)일대의 빨치산의 준동으로 하동지역 시장은 크게 시들었다. 이 때 대표적으로 쇠퇴한 시장은 花開시장을 비롯하여 하동읍시장, 옥종 문암시장 이였다.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장은 화개장터)
객주(김주영 작) 10권 61페이지 5일장의 효시는 성종(1457 ~ 1494년) 초에 전라도 무안과 나주에서부터 오랜 재해를 견디지 못하던 적탈민들이 집에 있던 곡식과 채소를 비석거리에 가지고 나와 필요한 물건과 바꾸어 연명하기 시작해서 장시를 이루게 되었고, 여러 세궁민들이 그에 합세하여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오르면서 주위의 풍경을 그려냈다.
객주(김주영 작) 3권 122페이지 섬진나루를 건너 광양땅 내륙으로 들어가 갈미봉(葛美峯)을 돌아 백운산(白雲山)을 멀리 끼고 양전(良田) 쪽으로 작로하는 길을 버리고 사뭇 섬진강 줄기를 따라 그 상류에 있는 구례까지 닿는 노정으로 고처 잡았다.
구례땅 토지골까지 60리 빠듯한 행보이고 내처 찬바람을 안고 성엣장을 건너고 강굽잇길을 쉴참없이 걸어야 아침 동자참에 구례 어름에 닿을까 말까 한다. 돌티미나루에 다압(多鴨)나루, 입직(立直)나루를 지나 고소성(故蘇城) 앞까지 사방이 훤히 트인 시오리 남짓한 길이 그런대로 반반하였지만, 고소성을 지나 화개땅 탑골(塔里)까지는 강폭이 좁고 계곡이 깊어 얼음장을 스쳐오는 밤 바람이 눈자위를 후벼 갈 듯 세차고 차가웠다.
탑골에서, 섬진강은 왼편으로는 그대로 흘러 구례 땅으로 빠지고 한 가닥이 쓸쓸히 혜어져 나가 지리산 계곡으로 게으름을 피우면서 기어올라 화개천(花開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전라도와경상도 가르기도 하며 어우르기도 하는 섬진강을, 저자를 도는 사람들이 80리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저자에 면해 있는 섬진강을 일컫는 말이다. 대저 강이란 그 시작이 있고 시작이 있으므로 그 끝 간 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섬진강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 끝간데는 분명하되 시작이 묘연한 강이 바로 섬진강이다. 그러므로 섬진강은 아무리 건너봐도 나루가 지천으로 깔리고, 그 시작이 필경 구천에 닿았으므로 흐름이 가볍지 않았고 숲이 멀지 않았다.
그러면 화개장의 옛모습은 어떠했을까. 김동리의 단편소설 「역마」(驛馬, 1948)에 잘 나타나 있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세 갈래로 나 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춘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전라 양 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중략)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도라지·두릅·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수들의 실·바늘·면경·가위·허리끈·주머니끈·족집게·골백분들이 또한 구롓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의 김·미역·청각·명태·자반조기·자반고등어 들이 들어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은성한 장이 서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 많고 멋들어진 진양조 단가,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개장터 (답사여행의 길잡이 6 - 지리산 자락, 초판 1996., 16쇄 2009., 돌베개)
백승종의 정감록에서
내가 택리지를 살펴보았더니 이중환은 이렇게 말했다.“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백두산의 큰 줄기가 끝나는 곳이다. 그래서 일명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蓬萊)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方丈)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瀛洲)라고 하는데 이른바 삼신산이다.” 이중환에 따르면, 사람들은 지리산에 태을성신(太乙星神·하늘 북쪽에 있어서 병란, 재화 및 생사를 다스리는 신령한 별)이 산다고 믿었다. 그밖에 여러 신선들이 그 산에 모인다고도 생각했다. 지리산은 계곡이 깊고 크며 땅이 기름진 데다 골짜기의 바깥은 좁으나 일단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넓어지기 때문에 백성들이 숨어 살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산속 깊은 데서도 농사가 잘 돼 승속(僧俗)이 섞여 산다는데 별로 애쓰지 않아도 먹고 살기에 문제가 없단다. 이중환은 지리산 사람들은 흉년을 모르고 살므로 아예 그 산을 부산(富山)이라고 불렀다.
지리산을 백두대간의 종착점으로 인식한 점에서 이중환의 생각은 ‘정감록’의 지리관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중환은 정감록에 미처 언급되지 못한 중요한 사실도 거론했다. 사람들이 지리산을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는 점, 그리고 지리산 주변의 경제 여건이 좋다는 점 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난세에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택리지’의 설명은 이어진다.“지리산 남쪽에 화개동(花開洞·악양동의 동남)과 악양동(岳陽洞·지리산 남쪽 섬진강변)이 있다. 두 곳 모두 사람이 사는데 산수가 아름답다. 고려 중엽에 한유한(韓惟漢)은 이자겸(李資謙)의 횡포가 심해지자 화가 일어날 것을 짐작했다. 관직을 버린 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악양동에 숨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찾아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한유한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도 신선이 돼 가야산과 지리산을 왕래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했다. 선조 때 한 스님이 지리산의 바위틈에서 종이 한 장을 주웠는데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동쪽나라 화개동은 병 속의 별천지(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신선이 옥 베개를 밀고 일어나 보니 이 몸이 이 세상에서 벌써 천년을 지냈구나(仙人推玉枕 身世千年).” 이중환의 말로는 그 필적이 최치원의 것과 동일했다 한다. 남사고 역시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이중환은 신선의 땅 지리산에서 최고의 복지로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 두 곳을 손꼽았지. 만수동은 조선후기에 구품대(九品臺)로 알려진 곳이요, 청학동은 매계(梅溪)란 말야.18세기부터 조금씩 사람들이 출입했던 것 같아. 그런데 지리산 북쪽도 나쁘지 않아. 경상도 함양 땅인데 그곳의 영원동(靈源洞·지리산 반야봉 북쪽), 군자사(君子寺·함양군 마천면 군자동) 그리고 유점촌(鍮店村)을 일찍이 난 복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豆扈津(두호진) -丁若鏞-
* 豆扈津: 하동부에서 10리 떨어진
지금의 화개나루.
鳴騶引頸欣出谷 명추인경흔출곡
野渡舟橫春水綠 야도주횡춘수록
조랑말 고개 늘여 골짜기 벗어나니,
나룻배 뜬 강에 봄물이 푸르구나.
沙平日暖市初集 사평일난시초집
萬爬煙生羅酒肉 만파연생라주육
따사로운 백사장에 이제 막 장이 서니,
부엌마다 연기나고 술고기 벌려있네.
岸邊牛馬交相戱 안변우마교상희
浦口帆檣森似束 포구범장삼사속
언덕엔 소와 말이 서로 얼려 희롱하고,
포구엔 돛단배들이 엮은 듯이 총총하네.
西通帶方北沙伐 서통대방북사벌
豪商大賈於斯簇 호상대가북사벌
서쪽은 남원으로 통하고 북쪽은 상주라,
크고 많은 장꾼들 떼지어 모여든다.
松京愛州轉錦綺 송경애주전금기
鬱陵耽羅輸魚鰒 울릉탐라수어복
개성, 중국 비단이 거쳐서 들어오고,
울릉, 탐라 생선, 전복들도 수입된다.
穰穰往來摠爲利 양양왕래총위리
誰能挽世塗耳目 수능만세도이목
많고 많은 오고 감은 모두 다 이익 때문,
누가 능히 세속의 귀와 눈 말릴 손가?
回看南嶽鎖煙霧 회간남악쇄연무
淸鶴高飛杳難逐 청학고비묘난추
돌아보니 지리산이 구름속에 잠겨있고,
청학은 높이 날아 좇아 가기 어렵구나.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길 :
그해 1월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임금을 속였다는 죄로 심한 문초를 받고 선조로 부터 지금의 합천 초계에 있는 도원수부에 백의종군 할것을 명을 받고 전라도를 거처 경상도 땅에 들어 섰다. 경상도에 내려오는 중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도 죄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합천 도원수 부로 길을 떠났다.
1597년(정유년) 7월 10일 악양에서 일박.
전재이 한창이던 1597년 (선조30년) 5월 26일 [양력 7월 10일]<병진>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
비를 무릅쓰고 길을 막 떠나려 하려는데, 사량만호 변익성(邊翼星)을 체찰사가 문초할 일이 있어 체찰사 앞으로 왔는데 이종호(李宗浩)가 잡아 왔다. 잠시 서로 마주 보고는 그 길로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비가 퍼 붓듯이 쏟아진다. 말을 쉬게 했지만,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이정란(李廷鸞)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을 닫고 거절당했다. 김덕령 (金德齡)의 아우 김덕린이 빌려 쓰는 집이다. 나는 아들 열로 하여금 억지를 대고서 들어가 잤다. 행장이 흠뻑 다 젖었다 .
5월 27일 [양력 7월 11일]<정사> 흐렸다가 개이다.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렸다. 저녁나절에 떠나 두치 최춘룡(崔春龍)의 집에 이르렀다. 류기룡(柳起龍)이 와서 봤다. 사량만호 이종호(李宗浩)가 먼저 왔었다. 변익성(邊翼星)은 곤장 스무 대를 맞아 꼼짝도 못한다고 했다.
5월 28일 [양력 7월 12일]<무오>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하동에 이르니, 하동현감(신진)이 서로 만나 보는 것을 기뻐하며 성 안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간곡한 정을 베푼다. 또 원(원균)의 하는 짓이 엄청 미쳤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했다. 변익성(邊翼星)도 왔다.
5월 29일 [양력 7월 13일]<기미> 흐리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머물러서 몸조리했다. 하동현감(신진)이 정다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황생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이가 일흔 살인데 하동에 왔는데, 일찌기 서울에 있었으나 지금은 떠돌아다닌다고 했다. 나는 만나지 않았다.
김주영 장편소설 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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