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풍 구초시에 / 선지명의 배를 건너
탑촌 앞에 계를 모아 / 법해산을 바래보고
가단으로만 돌아들제 / 대별상 날아든다.
금토 이북에 금소자 / 정금동 돌아드니
반갑구나 반갑구나 / 시영경채가 반갑구나
더디구나 더디구나 / 천리마 타고 온 행차
어째 그리도 더디던고 / 회강동안태봉은
어떤 인간이 계실런고 / 양자손이 귀하도다
다떨어진 산태동은 / 내 홍수 물에 놀래있고
짚고 짚은 도심촌은 / 신촌안에 있거니와
심저나 방애소리 / 신종이 불안허고
용강리는 구름이 뜨고 / 무주벽골 비가 묻어
가매소에는 물이 끓어 / 병풍소로 휘휘둘러서
허국소로 흘러가오 / 생기석문 새긴 글씨
고운선생의 필적이라 / 갓머리 밑에 나무목자
송나라 송자가 분명하여 / 미륵쟁이 독부체는
후후 천세를 도통하고 / 그 산 경치를 다보아도
상불 하불이 명지로다 / 국사암의 늙은 노승
중생지도를 하러가고 / 고둔 애비 바지저고리
팔폭장삼을 떨쳐입고 /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담줄은 팔에 걸고 / 구리백통 반안장도는
고름에다가 느직차고 / 송낙을 휘게씨고
구절 죽장을 걸쳐 잡고 / 오철철 나려와서
나무아미타불(3회 반복)
관세음보살(3회 반복)
중생제도 한 연후에 / 목압리는 목을타고
개원리라 타령하는 저 큰 아가 / 타령도 좋거니와
학업을 힘을 쓰라 / 보리암에는 볼을 맞고
미라태는 밀쳐 놓고 / 화랑수는 화가 나서
문턱 밖을 잠깐 열어 / 귀염쟁이 잠깐 쉬어
신행이라 올라 가서 / 세이암에 귀를 씻고
짐목쟁이 자는 새는 / 제 꿈에 제 놀래어
부자바구 가는 데는 / 부부유별이 완연하고
박단에는 박단보살 / 고사람은 괴사리요
그 산 경채 다 보아도 / 안땅재바 깜당재
그 산 경채 좋다마는 / 철불이라 올라가니
아자방이 참으로 좋네 / 아자방도 좋거니와
옥포대가 더욱 좋소 / 그 산을 넘고 넘어
해왕을 들어서서 / 쑥거리재를 넘을 적에
한둘이 넘기가 곤란커든 / 내가 온 줄을 생각해라
나무아미타불(3회 반복)
관세음보살(3회 반복)
구술자- 서옥계 할머니(77)
경남 하동군 화개면 석문리
* 전설의 고향이기도한 화개 *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도와 맞대어 있는 하동. 강변 백사장에 펼쳐진 송림과 쌍계사 등의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고장이다.
하동읍에서 다시 50여리 속살이 내비칠듯 맑은 섬진강의 짙푸름과 맨발로 흠씬 달려보고 싶은 고운 백사장을 차창 가까이 내다보며 달리면 화개면 소재지인 탑리에 닿는다.
이곳은 전남 구례-쌍계사-하동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다. 화개 장날의 풍경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경상,전라 양도 사람들이 모여 제고장 특산물을 자랑(?)하는 시합장이란 착각마져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쌍계사까진 15리, 칠불암이 있는 범왕리까진 30여리, 지리산의 가파른 계곡 사이로 들어간다. 그런데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점은 최치원 선생과 가락국 김수로왕에 얽힌 전설이 많다는 것. 범왕에 이르기까지 마을마다 한가지 전설이 전하지 않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리고 옥빛 맑은 물이 바위와 어울려 곳곳에 소를 이루어 흐르는 화개천과 내를 따라 벗꽃의 터널을 이룬 쌍계사까지의 벗꽃 길은 가히 절경이다.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는 시조 한수가 주민들 사이에 구전되어와 예부터의 화개의 명승을 짐작하게 한다.
- 두류산 양단수를 옛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경조차 잠길세라. 아희야 무릉도원이 어드메뇨 나는 곧 여긴가 하노라 - (강상수옹 구술)
* 도인의 예언가라고 하는 얘기도 *
'화개타령'은 탑리에서 부터 칠불암에 이르는 30여리의 경치를 읊은 노래다.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처럼 유려한 맛은 없어도 소박한 정취를 듬뿍 담고 있다.
- 인간천지 백인간은 / 부귀공명 씰데 없고 / 한국 단풍 구초시에 / 선지명의 배를 건너 / 탑촌 앞에 계를 모아..... -
이 노래를 들려준 서옥계 할머니(77 하동군 화개면 석문리)는 "우리가 어렸을 땐 어린아이들도 다 부를줄 알았다."며 일제시대엔 어른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 순사가 잡아간다하여 못부르게 했다고 한다.
'화개타령'의 유래에 대해 선할머니나 주민들 사이에 이설이 많아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고도 하고, 옛날 어떤 도인이 예언을 노래로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또 노래 가사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등이 삽입돼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불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아 형성된 노래로 보인다.
탑리에 사는 강상수 할아버지(71)의 이야기를 들으면 "탑리는 물론, 화개 골짝 모두가 절터였다. 탑리 조금 아래쪽의 사중터란 곳이 있는데 옛날 여기에 짚신을 벗어두고 절을 구경하며 한바퀴 돌아오면 짚신이 썩어 버린다는 전설이 전해온다"는 것. 그리고 옛날부터 화개엔 절이 있기 때문에 광대패들이 많이 모여 주민들 가운데서도 북치고 노래하는 한량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 한 주민은 화개는 물이 맑아 인심이 맑을 뿐만 아니라 양쪽 산이 우뚝 솟아 성격들은 고상하여 예부터 여기서 3제 8한신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고 귀뜸해 준다. 이런 이야기들이 '화개타령'의 배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노래따라 가는 길 *
'화개타령'도 '관동별곡'처럼 지명을 근간으로 가사를 엮어간다. 탑리에서 시작되는 지명들 가운데 주민들도 모르는 지명이 과반수가 넘는다. 가사에 나오는 지명을 따라가며 얽힌 이야기를 알아본다.
먼저 화개- 옛날 중국의 육조 스님이 임종하면서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머리를 한겨울에도 칡꽃이 피는 곳을 찾아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는 것. 제자들이 백방으로 찾아 화개나루에 당도했다. 그때 천지는 모두 눈에 덮였고 길은 세갈래인데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으려니 사슴 한마리가 현재의 쌍계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 사슴을 따라갔더니 양지바른 기슭에 칡꽃이 피어 있더라는 것이다. 이곳이 현재 쌍계사의 육조정상탑이 있는 고승당이고 화개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
탑리는 현재 화개 우체국 곁에 신라 봉상사 정중탑이라 전하는 3층 석탑 1기가 서있는데서 유래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법화산(지리산의 별칭)을 바라보고 1Km정도 가면 가탄이란 마을이 나온다. 지방에선 개톨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엔 가자를 아름다울가를 쓰고 여울탄을 붙여 가여울이라 한것이 변해 그렇게 됐다는 듯. 이곳은 최치원 선생이 쌍계사로 가다가 가탄 개울가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그날따라 달이 유난히 휘황하여 개울물에 비친 광경이 너무 아름다와 붙였다는 전설이다.
이어 닿는 마을이 정금이다. 이마을 역시 고운 선생이 잠시 머물러 가야금을 탔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런데 현재엔 우물 정자를 쓰고 있으나 옛날엔 머무를 정자를 썼다.
- 더디구나 더디구나 / 천리마 타고 온 행차 / 어째 그리 더디던고.... -
이렇듯 절경을 찾아가는 마음이 얼마나 급했으면 천리마을 탄걸음이 더디다고 표현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들 마을 앞을 흘러 내리는 옥계수의 정경도 빠뜨리지 않고 담았다.
- 가매소에는 물이 끓어 / 병풍소로 휘휘 들러서 / 허국소로 흘러가오..... -
지금은 도로 확장 등으로 주위 경관이 다소 변했으나 수천년동안 끊임없이 닳아진 크고 작은 둥근 바위들 하며 그새로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화개천. 정금 못미쳐 크게 굽이진 곳에 위치한 병풍소는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현재 나지막한 콘크리트 제방을 막아 옛풍취를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허국소는 아는 사람이 전혀없다.
* 왕비가 머물러 대궐터로 *
이윽고 석물리 쌍계사 입구에 이른다. 모암부락엔 소년암이란 바위가 있다. 옛날 친불암을 지을 때 기와를 굽던 곳이라고 하는데 일꾼들이 기와 옮기기를 싫어해서 한 소년이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기와를 옮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모암리의 산 옥편으로 통하는 김용업 할아버지(67)는 자기네들이 젊었을 때만 해도 비석이 세워져 있었으나 언젠지 모르게 없어져 버렸다고 말한다.
그 다음이 신흥, 여기엔 어른 3명쯤이 손을 잇대어 안아야 할만큼 굵은 귀목나무(느티나무)가 왕성국민학교 정문 앞에 서 있다. 그 아래 개울가에 세이암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최치원 선생이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가며 속진을 씻었다는 곳이다. 그때 지팡이를 꽂아둔 곳이 이 귀목나무라는 것. 버스는 여기까지 들어온다. 또 한가지 주민들이 이야기하는 전설은 쌍계사 이북의 내엔 게가 없게된 내력. 세이암에서 최치원 선생이 손을 씻는데 게가 손가락을 물어 손을 뿌리쳤다. 그랬더니 게는 쌍계사 아래쪽 내에 떨어졌다. 그 이후로 화개천엔 쌍계사 이북쪽에서는 게가 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신흥에서 왼편계곡을 따라 가면 닿는 곳이 범왕이다. 여기엔 가락국 김수로왕의 부인 허씨가 아들을 보러 왔다 하루밤 잤다해서 붙인 '대궐터'란 지명이 있다. 집은 비록 보잘것 없는 민가지만 왕비가 머문곳이니 대궐이 아니냐는 해설이다.
* 산채 묻어달랬다는 옥포대 *
- 칠불이라 올라가니 / 아자방이 참으로 좋네 / 아자방도 좋거니와 / 옥포대가 더욱좋소.... -
칠불암은 김수로왕의 아들 7형제가 불가에 귀의하여 성불한 곳이다. 여기에 있는 아자방은 유래가 없는 특이한 구들이 시설돼 더욱 널리 알려진 터다.
여순 반란 사건 뒤 반도들을 소탕하기 위해 작전상 절은 불태워졌으나 아자방은 원형대로 남아 있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채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보는 이마다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칠불암 정문 아래편에 지금은 흔적만 남은 못이 하나 있다. 경지라는 이름을 가졌다. 김수로왕이 아들 7형제가 보고 싶어 칠불암까지 왔으나 만날수가 없어 애를 태우다가 하루는 꿈에 암자 정문 앞에 못을 파고 못을 들여다보면 아들을 볼수 있을 것이란 가르침을 받았다.
실제 그대로 했더니 못물에 아들 7형제가 독경을 하면서 절안을 거니는 모습이 비쳤다는 것.
못이 지금처럼 황폐하기 전에는 주민들도 절의 정문 전경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칠불암 뒤를 거슬러 오르면 옥포대가 나온다. 이곳 경치는 너무나 빼어나 옛날 김수로왕이 여기에 왔다가 '산채로 묻어달라'고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어 6.25사변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쑥거리재, 여기를 지나면 지리산의 본줄기로 들어간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 있는 곳.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던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것 같다.
1979년 4월 27일 국제신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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